열거한 지표가 가리키는 지점은 하나,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경제 선진국'이란 사실이다. 다른 국가는 물론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 경제를 ‘개발도상국(개도국)’이라고 주장해왔다.
오랜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역사가 깨졌다. 우리 정부가 25일 그동안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던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겠다고 국제사회에 공언하면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5일 주재한 대외관계장관회의 직후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경제 선진국’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실상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선진국 대접을 받기 시작한 건 꽤 지났는데 왜 갑작스럽게 개도국 지위를 내려놨을까. 농민단체가 반발하는 데도 불구하고 밀어붙이는 이유는 뭘까. 피해는 없을까, 혹시 있다면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 문답 식으로 풀어봤다.
- 선진국 or 개도국?
- 선진국과 개도국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일관된 기준은 없다. 통상적으로 기대수명ㆍ소득수준ㆍ문맹률 등이 주요 기준으로 통한다. 2000년대 들어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이 객관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경제적 기준을 만들어 구분하기 시작했다. IMF는 1인당 소득수준, 무역 자유도, 금융 개방성 등을 분류 기준으로 활용한다. IMF 기준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1997년에 개도국을 졸업했다. 한국이 ‘경제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회원국으로 가입한 것도 1996년이다. 세계은행은 2016년부터 1인당 소득을 기준으로 저소득국가(1025달러 이하), 중하 소득 국가(1026~4035달러), 중상소득 국가(4036~1만2475달러), 고소득국가(1만2476 달러 이상)로 국가를 분류한다. 이 기준으로도 한국은 고소득 국가에 속한다. 코피 아난 전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은 선진국을 ‘모든 국민에게 자유를 주고, 안전한 환경에서 건강한 생활을 허용하는 국가’라고 정의했다. 대부분 주요 국제기구가 한국을 개도국이 아닌 선진국으로 분류한다.
- WTO 개도국 특혜가 뭐길래
- 한국을 개도국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 사례가 WTO다. 1995년 출범한 WTO는 개도국을 국제 자유무역질서 내로 편입시키기 위해 개도국에 대한 특별우대 조치를 시행해 왔다. 당시엔 회원국 선언만으로 개도국 지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은 농산물 무역적자 악화, 농가소득 저하, 농업기반시설 낙후 등을 이유로 농업 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택했다. WTO 협정 내 개도국 우대규정 조항은 약 150개다. 특히 농업에서는 선진국이냐 개도국이냐에 따라 의무 차이가 크다. 선진국은 개도국 대비 관세율과 농업보조금을 대폭 낮춰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놓을 경우 높은 관세를 매겨 자국 농산물 시장을 보호하거나 보조금을 통해 국내 농산물 가격을 유지할 수 없다. 김경미 농림축산식품부 농업통상과장은 “개도국 특별대우를 받으면 선진국 대비 모든 의무(관세감축, 농업보조금 등)를 3분의 2만 이행해도 된다”고 설명했다.
- 타격받는 우리 농작물은
- 개도국으로 남은 덕분에 우대받은 대표 농작물이 ‘쌀’이다. 공급 과잉에도 불구하고 농민 반발, 식량 안보 등 이유로 수입 쌀엔 높은 관세를 매기고, 쌀 농가엔 보조금을 주는 상황이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결과 ‘예외 없는 관세화’ 원칙을 채택했지만 한국은 1995~2014년 쌀 관세화를 유예했다. 2015년부터 매년 40만9000t의 쌀을 의무 수입하는 대신 높은 관세율(513%) 적용해 왔다. 100원어치 수입 쌀에 관세를 붙여 국내에선 613원에 판다는 얘기다. 쌀 수출국 입장에선 강력한 ‘무역장벽’으로 작용한다. 2008년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 의장이 내놓은 수정안에 따르면 한국이 선진국이 될 경우 쌀을 ‘민감품목’으로 보호하더라도 현재 513%인 관세율을 393%로 낮춰야 한다. 대부분 쌀 직불금으로 쓰는 1조4900억원 규모 농업보조금 총액(AMS)도 선진국으로 바뀔 경우 8195억원으로 한도가 ‘반 토막’난다. 쌀을 제외한 필수 작물도 타격이 크다. 예를 들어 수입산 마늘은 360%, 인삼(홍삼)은 754.3%, 양파는 135%, 대추는 611.5%의 관세를 물린다. 선진국 의무를 이행할 경우 마늘 276%, 인삼 578%, 양파 104%(각각 민감품목 기준)로 관세 장벽을 낮춰야 한다.
- 그런데 왜 갑자기 포기하나
- 홍 부총리는 개도국 지위 포기 이유에 대해 “우리 경제 규모는 선진국 수준으로 국제사회에서 개도국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다”며 “현시점에서 개도국 결정이 늦어지면, 대외적 명분과 협상력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불을 댕긴 ‘시발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윗’이란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트위터를 통해 “향후 90일 내 WTO 개도국 기준을 바꿔 (개도국) 우대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11개국을 거론했다. 중국을 겨냥한 트윗이지만 한국도 유탄을 맞았다. 여기 따른 ‘데드라인(23일)’은 이미 지났다. 트럼프는 OECD 가입국이면서 주요 20개국(G20) 회원이고, 세계은행에서 분류한 고소득 국가인 동시에 세계 상품무역에서 비중이 0.5% 이상 되는 국가가 WTO 개도국에 포함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는데 한국은 이들 기준에 모두 부합한다. 트럼프가 지목한 국가 중 싱가포르ㆍ브라질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고, 중국은 거부했다. 정부의 이번 결정엔 미국의 통상 압박과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대응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고집할 경우, 미ㆍ중 무역분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개도국 특혜’를 계속 누리고 싶어하는 중국처럼 미국과 맞서는 형국이 될 수 있다. 자동차 관세 등을 포함한 통상 문제, 내년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을 고려하면 미국과 관계를 좋게 가져가는 것이 유리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다른 현안에서 우호적인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의도다.
- 정말 피해 없나
- 단순히 트럼프의 엄포 때문에 이번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당분간 관련 혜택을 유지 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홍 부총리는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에 따라 결정한 현재 농산물 관세율이나 농업보조금총액(AMS)은 새 농업협상이 타결되고, 각국이 이행계획서를 제출ㆍ검증한 뒤 국내 비준 등 절차를 마무리할 때까지 유지된다”며 “더구나 가까운 장래에 WTO 농업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 농업 분야를 포함한 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은 회원국 별 입장 차로 10여년 넘게 중단된 상태다. 정부로서는 개도국 지위 졸업을 선언해도 선언적 의미 외에 불이익은 없다고 본 셈이다. 반면 농업계는 앞으로 WTO 농업 관련 협상이 100% 없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이익이 있다면 미국과 갈등도 당연히 감내해야 하겠지만,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농업을 포함해 어떤 손해도 없다”고 강조했다.
- 정부가 “포기 아니다” 강조하는 까닭은
- 홍 부총리는 “이번 정부 결정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미래 WTO 협상에 한해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개도국 지위 포기는 과거 WTO 협상에서 확보한 특혜까지 포기한다는 의미이므로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한 정부 결정사항과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을 포기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한데도 정부가 ‘포기’ 해석에 정색하고 나선 건 농업계 반발을 의식해서다. 농민단체는 이날도 외교부 청사 앞에서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다. 이번 결정이 농업 부문 보조금 삭감 등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임영호 한국농축산연합회 회장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는 건 국산 먹거리를 통째로 미국에 바치겠다는 얘기”라며 “ 300만 농업인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민단체 주요 요구 사항은 ▶공익형 직불제 도입 ▶농업 예산 확대(전체 예산의 4%) ▶농가 소득 보장 ▶농산물 가격 안정 대책 ▶통상ㆍ식량 주권 실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ㆍ관 합동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다.
- 성난 農心 달랠 대책 있나
- 정부는 개도국 포기와 상관없이 쌀 등 일부 농산물에는 예외적인 보호조치를 추진할 계획이다. 수입 쌀에 대한 513% 관세도 유지할 방침이다. 보조금 역시 WTO에서 허용하는 품목 불특정 최소 허용 보조 등을 활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농어촌 상생 협력기금’도 확대 지원하기로 했다. 이 기금은 2015년 한ㆍ중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당시 농업계 반발이 거세자 여ㆍ야ㆍ정 합의로 만든 기금이다. FTA 수혜 기업이 자발적으로 출연하기로 했지만 매년 목표액의 절반도 못 채우는 수준이다.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은 “기업 출연을 활성화하도록 인센티브 확대, 현물 출연 등 필요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김 차관은 “‘공익형 직불제(작물ㆍ가격 상관없이 면적당 일정액 지급)’를 조속히 도입하겠다”며 “관련 예산을 올해 1조4000억원에서 내년 2조2000억원으로 대폭 늘렸다”고 말했다. 공익형 직불금은 WTO가 규제하는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아 안정적으로 지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농업 보조금을 가격을 지지하는 형태로 직접 주는 방식(현 직불금) 대신 가격과 직접 연계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꾸면 지금보다 지원을 더 늘릴 수 있다”며 “통상 후진국은 직접 가격을 보조하지만, 선진국으로 갈수록 간접 지원하는 형태며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과거 농업 정책이 농산물 가격을 안정화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농가소득 보전뿐 아니라 농산물 경쟁력 향상까지 고려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2019-10-25 07:27:10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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