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심판의 이중 생활
지난달 9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 서울 이랜드의 축구 경기. 시작 전, 중계를 맡은 송재익(78) 캐스터가 주심을 소개했다. 송 캐스터는 중계할 때 주심의 또 다른 직업을 취재해서 전한다.
축구 심판은 대개 직업이 하나 더 있다. 2010 남아공월드컵 결승전 주심이었던 하워드 웹은 경찰, 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 주심 피에르루이기 콜리나는 재무설계사였다. 국내에도 이들 못지않게 다양한 직업을 가진 축구 심판이 있다. 의사, 자영업자, 환경미화원, 체육교사…. 어느 일이 본업이고, 무엇이 부업인지는 묻지 마시라. 개그맨 유재석이 어느 날엔 부(副)캐릭터 유산슬이듯, 이들도 마찬가지. 지금부터 이들의 이중생활(?)을 소개한다.
지난 16일 오후 2시. 지하철 7호선 광명 사거리역 인근 롯데리아 매장. 점주 정근학(49)씨가 손님 응대에 한창이었다. 그는 20세 때 롯데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정직원·점장을 거쳐 점주가 됐다. 그가 주중에 주로 입는 옷은 롯데리아 유니폼이지만, 주말엔 다르다. 검은색 반소매 상의와 하의,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스타킹…. 한 손엔 하늘색 호루라기, 다른 손엔 노란·빨간색 카드를 든다. 그는 1급 축구 심판이다. 정 점주는 "어렸을 때부터 워낙 축구를 좋아했다"며 "선수로 활동하기는 어렵지만 축구 심판은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2007년 심판 자격증을 땄다"고 했다.
같은 날 오후 6시. 서울 광진구 세종스포츠정형외과 김진수(44) 원장은 막 환자 진료를 끝낸 참이었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그는 5급 축구 심판. 군의관 3년 차 때 심판 자격증을 땄다. "군대에서 다치는 사람의 절반은 축구 하다 그런 거예요. 제 꿈이 스포츠 닥터였는데, 그러려면 실제 축구가 어떤 운동인지 잘 알아야 하겠더군요. 심판 자격증을 따면 축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송 캐스터가 소개했던 김동진(47) 주심은 안동과학대학교 축구과 교수다. 그는 1급 심판이자, 지난해까지 국제 심판으로 활동했다. 대학 때는 축구 선수로 뛰었다. 김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해오다 보니, 축구에 미련이 남더라"며 "심판을 하면 경기장에 남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앞선 두 사람과 달리 축구 심판을 먼저 시작하고, 직장을 구했다. 심판 일을 겸하는 조건으로, 스포츠 마케팅 회사에 들어갔다.
축구 심판이 '전업 심판'을 망설이는 건, 월급이 아닌 수당을 받기 때문이다. 1부 리그인 'K리그1' 주심은 경기당 200만원, 2부인 'K리그2' 주심은 100만원을 받는다. 심판을 자주 보면 수당을 많이 받을 수 있지만, 판정 논란 등이 생기면 심판 배정을 못 받기도 한다. 김 교수는 "정기적인 수입이 없다 보니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힘든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국제 심판은 국내보다 상대적으로 수당이 높지만, 잦은 해외 출장 등으로 겸업하기 어렵다. 김 교수도 국제 심판을 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심판과 석·박사 과정을 병행하며 시간 강사 일을 하다가, 지난해 안동과학대 교수로 부임했다.
지난 17일 기준,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축구 심판은 9826명이다. 그중 실제 활동하는 심판은 2000여명. 축구협회 측은 "대부분의 심판이 심판 외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국내에서 축구 심판이 되려면, 축구협회에서 운영하는 축구 심판 자격시험을 봐야 한다. 교정시력 좌우 1.0 이상인 만15세 이상 남녀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 각 시도 축구협회에서 4일간 교육받고, 이론·실기 평가에서 60점 이상 받으면 된다. 이후 체력 측정을 통과하면 5급 심판 자격을 얻는다.
체력 측정은 심판 도전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먼저, 40m를 6번 뛰어야 한다. 남자는 매번 6.8초, 여자는 7.2초 내에 통과해야 합격이다. 그다음은 75m 뛰고, 25m 걷기 12회 반복. 75m 뛰기는 남자의 경우 17초 내에, 25m 걷기는 22초 내에 들어와야 한다. 여자의 경우 각각 19초, 24초다.
5급 심판이 되면 동호인 경기 주심, 4급은 전문축구 초등부(U-12) 경기 주심 등, 급이 올라갈수록 상위 경기 심판을 볼 수 있다. 1급 심판 중 50여명을 선발해 프로 경기 심판을 맡긴다. 급수마다 활동 기간과 경기 수 등을 고려해 승급 자격을 준다.
한 번 자격증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보수교육과 함께 매년 자기 급수에 맞는 체력 테스트를 통과해야, 그해 심판으로 활동할 수 있다. 비활동 기간이 5년이 넘으면, 심판 자격이 박탈된다.
체력은 심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 정 점주는 일주일에 3~4일은 8㎞씩 뛴다. "심판은 항상 공 주변 10~15m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한 경기 심판을 보는데 많게는 12㎞씩 뛰어요. 심판이 못 뛰면 판정에 피해를 줄 수 있으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죠."
김 교수 역시 마찬가지. 월요일에는 최소 4㎞ 이상 뛰고, 다음 날엔 헬스장에서 근지구력 운동을, 그다음엔 수영을 한다. 키 180㎝에 몸무게 78㎏. 20년간 몸무게가 변한 적 없다.
김 원장은 체력 테스트에서 떨어져 한동안 심판을 보지 못하다가, 올해 이를 통과했다. 당시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잦은 야근과 회식 등으로 몸 관리를 거의 못할 때였다.
두 직업에서 오는 딜레마도
심판으로서 가장 괴로운 순간은 잘못된 판정을 내렸을 때다. 정 점주는 "나로 인해 팀에 불이익이 갔을 때, 굉장한 압박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 교수는 가족들을 경기장에 오지 못하게 한다. "한 번은 아이가 경기장에 왔다가 축구 팬들이 제 욕하는 걸 들었어요. 마음이 울컥하더군요."
두 직업을 가지면서 생기는 딜레마도 있다. 김 원장이 심판을 보는데, 선수 손목이 부러졌다. 심판을 봐야 하니 아무 조치도 못 했다. 경기가 끝나고 '내가 의사인데 응급처치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후회가 들었다. 선배 심판에게 얘기하니, "평소엔 네가 의사라도 그 순간엔 심판이니 심판 역할을 하는 게 맞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신 뇌출혈 등 생명의 위협이 생기는 순간엔 바로 돕는다는 기준을 세웠다.
축구 심판의 은퇴 시기는 대개 45세에서 50세 사이. 공교롭게도 이들의 나이는 모두 이 범위거나 근접해 있다.
김 원장은 "일단은 내년에도 체력 테스트를 통과하는 게 목표"라며 웃었다. "심판을 깔끔하게 봐서, 치열하게 경기한 두 팀이 모두 만족할 때 희열을 느낍니다. 의사 중에 골프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있듯, 제게는 심판이 좋은 취미랄까요." 김 교수는 올해부터 국제 심판 자격을 갱신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U-20월드컵 심판도 보고 아시안게임도 두 번 갔다 왔는데, 성인 월 드컵 심판은 못 했어요. 후배들 잘 키워서, 제가 못 이룬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정 점주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2~3년은 심판으로 더 뛰고 싶다"고 했다. "돈이 목표였다면 진작 그만뒀을 거예요. 심판으로 인해 팀의 승패가 좌우되지 않고 경기가 깔끔하게 마무리됐을 때 성취감, 선수와 관중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때 자부심을 느낍니다."
June 20,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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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주중엔 햄버거, 주말엔 옐로카드… 나는 축구 심판입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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