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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윤의 전설을 만나다] 베트남 프로축구 돌풍의 주인공 정해성 감독② - 넥스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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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NTV>

[편집자 주] 베트남에 축구한류 열풍이 거세다. 베트남 국민을 열광시키고 있다. 박항서 감독이 거둔 뛰어난 성적 덕분에 베트남 프로축구 ‘V리그’도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한국인 지도자가 또 있다. 정해성 호치민 FC 감독이다.

축구계 의리의 남자로 불렸던 정해성 감독은 베트남에서도 넓은 포용력으로 선수들을 이끌고 있다. 2부 리그 강등 위기에 놓였던 팀을 취임 1년 만에 리그 2위로 끌어 올렸다. 베트남 축구관계자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베트남 축구협회도 정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해 ‘2019년 올해의 감독상’을 수여했다. 특히 우승팀 감독을 제치고 수상했다는 점에서 이변이라 할만하다.

정해성 감독은 한국월드컵대표팀 전문 코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한국축구발전에 기여했다. 정해성 감독을 만나 월드컵 뒷얘기와 베트남 축구의 현황을 들어 본다. 파란만장했던 축구 인생도 되돌아본다.

(1편에 이어)
Q. 정해성 감독의 지도자 생활 중 히딩크 감독과의 인연은 빼놓을 수가 없다. 곁에서 바라본 히딩크 감독의 지도방식은 어땠나.

워낙 많은 이야기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피지컬 전문코치의 필요성을 알려 준게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히딩크 감독이 오기 전까지는 한국축구에 체력담당 코치 제도가 없었다. 코치들에게도 정확한 역할을 정해 줬다. 히딩크 감독은 3개월 동안 모든 코치에게 역할을 돌려가며 주었다. 3개월이 지나고 회의를 통해 최종업무를 분담시켰다. 그때부터 대회가 열리는 1년 6개월 동안은 코치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만 하면 됐다. 정말 코칭스태프 간에 잡음이 조금도 없었다.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과 선수단 장악력은 대단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선수단에 대한 지원이 상상을 초월했다. 2002년 월드컵 출전선수가 23명이었는데 스태프가 22명이었다.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 같다.

Q. 2002년 월드컵의 비화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제주도 전지훈련에서 있었던 일이다. 히딩크 감독이 폴란드와의 1차전을 앞두고 선수단 전원에게 1박 2일 휴가를 줬다. 코칭스태프와 결혼한 선수들에게는 가족을 모두 데려오라 했다. 미혼 선수에게는 애인도 오라고 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의 1박 2일 휴가가 결국 4강 신화의 밑거름이 됐다. 그동안 훈련과 긴장감으로 쌓였던 스트레스가 싹 사라졌다. 그런 정신적 여유로 폴란드와 1차전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고 4강까지 진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한국축구를 존중해 줬다. 사실 히딩크 감독이 맡았던 조국 네덜란드와 한국축구의 차이는 엄청나지 않았나. 그런데도 히딩크 감독은 한국코치들에게 정확한 업무를 주며 팀을 이끌었다. 한국축구의 기술은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격려도 하며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Q. 2002년 월드컵 코치 때 훈련하다 갈비뼈가 부러졌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2인 1조로 짝을 지어 체력훈련을 할 때였다. 선수들끼리 짝을 맞추다 보니 인원이 모자랐다. 히딩크 감독이 차두리와 짝을 맞추라 했다. 몸싸움 훈련이었다. 그때는 선수들도 차두리와 짝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차두리가 워낙 힘이 좋아 선수들이 피하려 했다. 결국 차두리와 몸싸움을 하다 갈비뼈가 부러졌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히딩크 감독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알았다. 나중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훈련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이동할 때 버스를 타면 통증이 심해질 수 있다며 자신의 승용차를 내줬다. 괜찮다 해도 계속 타라 해서 이틀간 타다 돌려줬다. 히딩크 감독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Q.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월드컵 예선 과정이 쉬운 게 아니다. 모든 경기가 힘들고 신경이 쓰인다. 그때는 북한과 예선전을 치르게 돼 또 다른 관심을 끌게 됐다. 본선에서의 어려움은 기후 문제였다. 본선을 치러야 할 남아공 경기장이 고지대에 있었다. 본선을 앞두고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을 갔다. 엔트리 23명보다 3명을 더 뽑아 데리고 갔다. 부상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대회 1주일을 앞두고 최종명단을 발표해야 했다. 허정무 감독님과 의논할 때부터 분위기가 침울했다. 최종명단 발표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정도의 참담한 심정이다. 결국 구자철, 이근호, 신형민 3명이 탈락했다. 선수들에게 탈락 소식을 전할 때의 심정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새벽에 짐을 싸들고 숙소를 떠나는 선수들 뒷모습을 보는 게 바로 지옥이었다. 다시 그런 일을 하라면 죽어도 못 할 것 같다. 선수들은 우리의 후배이자 아들이지 않은가. 지도자의 숙명이라 생각하지만 너무 가혹하다.

Q. 최종명단에 들어가도 경기를 한 번도 못 뛰는 선수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죽을 맛이다. 한 경기에 교체할 수 있는 선수는 3명뿐이다. 11명이 출전하고 나면 나머지 선수들은 라인 밖에서 몸을 풀고 있다. 상황에 따라 경기 중에 선수를 교체한다. 3명째 선수를 교체하면 몸풀기를 중단한다.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할 수 없어서다. 그럴 때 선수단의 분위기가 나타난다. 경기에 못 뛰게 된 선수가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행히도 2002년과 2010년 월드컵에서는 후보 선수들이 오히려 코칭스태프를 격려했다. 우리는 괜찮다고 웃음을 보였다. 선수단의 이런 분위기가 좋은 성적을 냈다고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선수들이 코칭스태프를 도와준 결과였다.

Q.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 2002년 영웅 이운재 선수가 한 경기도 못 뛰지 않았나.

맞다. 코칭스태프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스와 1차전이 잡혔다. 그리스 선수들이 장신이었다. 직접 보니까 우리 선수들보다 목이 하나는 더 큰 선수가 4명이나 있었다. 회의 끝에 공중볼에 강한 정성룡을 주전으로 내세웠다. 정성룡이 1차전에서 선방을 했다. 자연히 다음 경기도 정성룡이 주전으로 출전했다. 이운재는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는데 티를 안 냈다. 오히려 정성룡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해주며 팀 분위기를 살려 줬다. 그런 희생정신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준 원천이 됐다. 지금도 이운재 선수에게는 고마울 뿐이다.

Q. 2018 러시아월드컵 예선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부진에 빠졌을 때 구원투수로 코치를 맡았지 않은가.

이용수 당시 기술위원장의 요청이 있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 대표 팀을 맡다 보면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간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때는 중간에 코치로 들어가 선수들과 교감을 이루는 게 힘들었다. 이 말은 선수들과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이 있어야만 선수들이 고민을 털어놓고 의논하게 된다. 예선을 천신만고 끝에 통과했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나도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3편에서 이어집니다)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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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7, 2020 at 08:5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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