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첫 해부터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선수 시절부터 꿈꾸던 축구 철학을 그라운드에 풀어내려면 그만한 경험을 쌓을 시간이 필요한 터. 눈앞의 성적보다 그 시간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따라 지도자로서 성패가 갈린다.
올해 K리그에 뛰어든 사령탑들은 다행히 자기 색깔에선 둘째가라면 서럽다. 2부리그의 만년 꼴찌 서울 이랜드FC에 부임한 정정용 감독(51)은 그야말로 ‘성적보다 육성’을 외친다. 정 감독은 꼭 1년 전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던 인물. 유소년 축구에 정통한 그답게 프로 무대에서도 평균 연령 24세 안팎의 젊은 선수들을 이끌고 5할 승률(1승3무1패)을 지키고 있다.
정 감독의 확고한 철학이 드러난 순간이 지난달 27일 FC안양전 첫 패배(0-2)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정 감독은 첫 승리가 절실한 순간이었지만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선발 명단 11명 중 7명을 바꿨다. 당시를 떠올린 정 감독은 “성적만 생각한다면 잘못된 결정일 수도 있지만 백업 선수들에게 희망과 기회를 줘야 우리가 성공한다고 믿었다. 고비만 잘 넘기면 ‘위’(1부)도 바라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남일 성남FC 감독(43)은 ‘전술은 협업, 감독은 용병술’이라고 외친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당시 그는 ‘진공청소기’라는 애칭처럼 한 가지에 능한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했다. 김 감독은 지도자로도 다재다능보다는 전체적인 용병술과 선수단 관리에서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 경기를 풀어가는 전술은 정경호 수석코치에게 전적으로 일임한다.
김 감독과 정 코치가 K리그에서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이들의 독특한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김 감독은 “팀 운영은 감독, 전술은 코치”라면서 “코칭스태프가 분업화된 역할에 대해 인식을 잘 공유하고 있고, 호흡이 잘 맞아 힘이 된다”고 말했다. 개막 전 1부리그에서 약체로 분류되던 성남이 올해 4위(2승2무1패)로 승승장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틀린 말이 아니다.
올해 전남 드래곤즈에서 ‘대행’ 꼬리표를 뗀 전경준 감독(47)은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한다. 전 감독은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독일을 무너뜨린 ‘카잔의 기적’을 주도했던 축구 전술가. 전 감독은 전남에서도 전술의 효용성 확대를 위해 벤치가 아닌 관중석에서 무선 마이크로 작전 지시를 한다. 보통 징계를 받은 지도자들이 벤치에서 쫓겨날 때 관중석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색적인 일이다.
눈높이가 다른 그의 지시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전남의 전술은 2부리그 유이의 무패(1승4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전 감독은 “밑(벤치)에선 볼 수 없는 게 위(관중석)에선 보인다”고 활짝 웃었다. 만약 전 감독이 올해 전남을 1부리그 승격으로 이끌 수만 있다면 그의 행보는 전술에 자신있는 지도자들의 롤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설기현 경남FC 감독(41)은 “코치는 내 색깔을 보여줄 수 없다”는 지론 아래 코치를 생략한 채 감독으로 출발했다. 설 감독의 개성있는 축구는 그야말로 ‘공격 앞으로’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데뷔전이었던 지난달 10일 전남과의 개막전에서 공격수 4명을 전방에 배치하더니 17일 서울 이랜드전에선 5명으로 공격을 늘렸다. 공격 숫자가 늘어난 만큼 줄어든 수비조차 공격에 가담하기 일쑤. 스페인이나 남미에선 종종 볼 수 있는 가분수 전술이 빚어내는 화끈한 공격 축구가 전·후반 90분 내내 펼쳐진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비가 약점이라지만 팬들의 환호성에 모두 가려진다. 최강희 전 전북 감독(현 상하이 선화)이 중국으로 떠난 뒤 잠시 사라졌던 ‘닥공’의 재현이다. 김대길 스포츠경향 해설위원은 “초보 감독들이 앞으로 어떤 성적을 낼 지는 알 수 없지만 색깔은 제대로 보여줬다. 앞으로 성적까지 두 토끼를 잡는다면 지도자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June 13, 2020 at 04: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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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색 찬란' K리그 초보 사령탑들의 흥미진진 색깔 축구 - 스포츠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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